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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자 별세 사망 아들 배우 남편 박웅 나이

인물서기 2025. 5. 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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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자 별세 사망 소식, 그리고 그녀가 남긴 진심의 무대

우리 곁을 조용히 떠난 배우 장미자 선생님의 소식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2025년 1월 27일, 서울 자택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한 시대가 정말 끝났구나 싶었어요. 연극과 방송, 그리고 성우 활동까지 다양한 무대에서 감동을 안겨준 장미자 님은 향년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조용하고 단아하게 무대에서 내려온 그녀의 마지막 여정은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시작되어 많은 동료들과 제자들의 따뜻한 배웅 속에 마무리되었습니다. 1월 29일 새벽 발인이 있었고, 장지는 서울시립승화원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녀가 걸어온 길만큼이나 품격 있는 마지막이었습니다.

공개되지 않은 병마,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던 무대

장미자 선생님의 구체적인 사망 원인은 유족의 뜻에 따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지병과 싸워오신 것으로 알려졌어요. 병세가 악화된 와중에도 무대 위에 서기를 멈추지 않으셨다니, 그 열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연극 '춤추는 은빛 초상화'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단순한 연기를 넘어서 한 인생 전체를 담아낸 듯한 감동이 있었거든요.

주변에서는 그녀를 두고 "연기를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진짜 배우였다"고 기억합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았음에도 관객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단순히 병으로 인한 별세가 아니라, 예술 인생 전체가 막을 내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래서겠죠.

장미자 남편 박웅과의 동행, 예술과 삶을 함께한 시간

장미자 선생님의 인생에는 든든한 동반자였던 배우 박웅 씨가 있었습니다. 두 분은 동아방송 성우 1기로 인연을 맺은 후 평생을 함께하며 무대와 삶을 함께해왔어요. 둘의 관계는 단순한 부부 이상이었습니다. 서로의 작품에 의견을 주고받으며 창작자로서도 깊은 유대감을 나눈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지요.

 

두 아들도 계신 것으로 알려졌는데, 구체적인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이 함께한 모습을 통해 서로 간의 깊은 정이 느껴졌다고 해요. 특히 박웅 씨는 말없이 곁을 지키는 모습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데뷔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쉼 없는 연기의 길

장미자 배우는 1962년 연극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으로 연기 인생을 시작하셨고, 이듬해 동아방송 성우로 발탁되며 방송계로 영역을 넓히셨습니다. 이후 KBS 성우 6기로 재편된 후에는 성우로서도 굵직한 존재감을 남기셨죠.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꾸준히 활약해오셨고, 그 중 몇 작품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습니다.

 

드라마 '토지', '제2공화국', 'TV 손자병법', '솔약국집 아들들', '사랑을 믿어요', '눈이 부시게',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 된 '킹더랜드'까지... 연기력 하나로 시대를 관통한 흔치 않은 배우였습니다. 연극계에서도 '금삼지혈', '이괄과 흥안군', '춤추는 은빛 초상화' 같은 작품으로 무대의 감동을 전해주셨고요.

 

영화에서도 '반금련', '내가 살인범이다' 등에서 다양한 인물을 훌륭하게 소화하셨습니다. 어떤 캐릭터든 장미자 배우의 손을 거치면 생명력이 불어나는 느낌이 있었어요.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장악한 성우 활동

장미자 님의 목소리는 정말 깊고 따뜻했죠. 그래서일까요, 더빙계에서도 그녀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습니다. 광고, 내레이션, 라디오까지 그녀가 마이크 앞에 선다면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졌어요. 단지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감정을 전하는 방식이 남달랐거든요. 목소리를 통해 인물을 그리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거겠죠.

후배 성우들이 그녀를 따라하고 싶어 했고, 또 실제로 그녀의 톤과 발성, 감정선에 영향을 받은 이들도 많습니다. 한국 성우계에서 그녀의 이름이 하나의 교본처럼 남은 이유, 거기에는 이유가 분명했어요.

국민 시어머니, 현실을 담아낸 연기

KBS2의 대표 프로그램이었던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에서의 장미자 배우는 정말 강렬했어요. 특히 시어머니 역할로 대중에게 큰 인상을 남기셨는데, 그 연기가 너무 현실 같아서 “우리 엄마 같아”, “우리 시어머니 같다”는 말들이 나왔을 정도였죠.

엄격하면서도 인간적인, 때로는 따뜻한 한마디로 가슴을 울리던 그 연기는 수많은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 덕분에 장미자 선생님께는 '국민 시어머니'라는 별명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고요. 연기자에게 있어서 대중이 붙여준 별명이 가장 큰 영광이라면, 그만큼 사랑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죠.

이 프로그램이 그녀의 노년기 커리어에 새로운 도약점이 되었고, 그 무렵 다시 한 번 장미자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현상이었고,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진정성의 연기였어요.

한 시대의 배우가 남긴 여운

장미자 선생님의 부고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녀의 ‘꾸밈없던 연기’였어요. 어떤 작품이든, 어떤 배역이든 늘 진심을 다해 대하셨고, 그래서 관객들도 진심으로 반응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분의 연기를 떠올릴 때, 저는 늘 따뜻함과 함께 약간의 짠함을 느껴요. 그게 아마도 그녀가 연기에 담은 인생의 무게 때문이겠죠.

 

장미자 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지 수많은 작품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무대를 내려오면서도 관객을 향한 마음만큼은 단 한순간도 놓지 않으셨던 그 마음.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마음의 크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조용하지만 힘 있게. 장미자 선생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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