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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숙 영부인 사망 프로필 나이 | 김옥숙 여사 별세

인물서기 2025. 5. 2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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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숙 영부인 사망 프로필 나이 | 김옥숙 여사 별세

세월이 지나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사람들의 흔적은 참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조용한 존재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분, 김옥숙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그녀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한 시대를 함께한 영부인으로서 깊은 울림을 남긴 인물이에요.


지금은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한 시대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늘 속에서 소리 없이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분이 바로 김옥숙 여사입니다. 그녀는 화려함보다는 절제, 드러남보다는 뒷받침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인물이죠.

김옥숙 영부인 1935년 청송의 소녀, ‘신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다

김옥숙 여사는 1935년 음력 9월 8일,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녀는 전통 깊은 신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김영한과 어머니 홍무경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였지요. 유교적 가치가 뿌리 깊은 집안에서 성장했기에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단정한 태도를 지니셨다고 해요.
 


형제자매로는 세 명의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는데요, 오빠들 중에는 정치권과 공직계에서 이름을 알린 분들도 계셨고, 여동생 김정숙 씨는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혼인하여 정·관계와 인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김옥숙 여사 역시 보통의 일반 가정이 아닌, 시대적 영향력이 있던 집안의 일부였던 셈이지요.

학업을 향한 열정, 하지만 가족을 선택한 젊은 날

그녀는 대구덕산국민학교와 경북여자고등학교를 거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가정교육과에 입학했어요. 당시 여성으로서 대학 진학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그녀는 그런 문턱을 넘었지요. 그러나 학업을 끝까지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가족 사정과 여건으로 인해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삶의 방향을 조금 더 조용하고 안정적인 쪽으로 틀게 됩니다.
 


1959년, 그녀는 당시 육군 장교였던 노태우 씨와 결혼하게 되는데요, 이 선택은 이후 그녀의 인생 전체를 뒤바꿔놓는 시작이었지요. 결혼 후에는 아내로서, 또 두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가며 자신의 삶을 국가와 가족이라는 큰 틀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습니다.

소리 없이 조명 속에 서다 – 13대 영부인의 시작

1988년 2월, 노태우 씨가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김옥숙 여사는 공식적으로 '영부인'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시대상, 영부인의 존재감이 이전보다 더 부각되던 시점이었지만, 그녀는 예상과는 다르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공식 행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일정을 조용히 소화했고, 언론과의 접촉도 최소화하며 매우 절제된 생활을 하셨습니다. 카메라 앞에서조차도 항상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죠. 말보다는 행동으로, 명확한 메시지보다는 절제된 분위기로 존재감을 보여주던 분이셨어요.

이순자 여사와의 비교, 그리고 조용한 내조의 상징

김옥숙 여사의 이런 행보는 당시 바로 직전 영부인이었던 이순자 여사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뤘습니다. 이순자 여사가 강한 존재감과 활발한 외유, 때로는 과잉 노출로 비판받았던 반면, 김옥숙 여사는 철저히 조용한 그림자 내조를 택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자선활동, 여성복지 관련 기관 방문, 보육시설 후원 등은 늘 꾸준히 진행되었어요. 다만 카메라 앞에서 드러내는 걸 꺼렸을 뿐이죠. 특히 1988년 광주의 망월동 묘지를 비공식적으로 방문한 일화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상징적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발걸음 하나만으로도 많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죠.

종교도 함께한 여정, 신앙과 함께한 부부의 삶

김옥숙 여사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지만, 남편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셨습니다. 세례명은 ‘마리아’로, 이후에도 가톨릭 신앙을 꾸준히 지키며 살아오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행동과 삶의 태도 전반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지요.
 


그녀는 신앙만큼이나 학창시절에 대한 애정도 깊으셨어요. 경북여자고등학교 동창회와의 인연을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셨고, 학교의 발전을 위한 기부도 조용히 이어오셨습니다.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게 행동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진짜 조용한 선행을 이어온 분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퇴임 이후에도 이어진 내조, 그리고 또 한 번의 망월동 방문

노태우 대통령의 퇴임 이후에도 김옥숙 여사의 삶은 변함없이 조용했습니다. 휠체어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시기에도, 그녀는 남편의 병간호를 직접 하며 곁을 지켰어요. 그리고 2021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장례식장을 찾았고,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놀라운 건 2025년, 다시 한 번 광주 망월동 5.18 묘지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
해졌다는 거예요. 그것도 37년 만이었죠. 나이와 건강 상태를 감안하면 쉽지 않았을 결정이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다시 섰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자체로 전해진 울림은 참 컸습니다.

비판과 오해도 있었던 시절 – '비자금 논란'의 그림자

그녀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 부분을 빼놓을 순 없겠죠. 1990년대 중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을 당시, 김옥숙 여사 역시 일부 비판의 중심에 서야 했습니다. 특히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자금이었다"는 해명과 실제 기부내역(월 2천 원 수준)이 너무 괴리감이 컸다는 점에서, 많은 국민들이 실망감을 표했죠.


그 시절은 많은 이들에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동시에 권력자의 배우자라는 위치가 가져오는 무게감을 새삼 실감케 했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영부인 중 나이 최고령, 그녀가 남긴 조용한 유산

2025년 현재, 김옥숙 여사는 살아 있는 전직 영부인 중 최고령이십니다. 지금도 서울 연희동의 자택에서 조용히 지내고 계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삶의 내력이나 공개 행보는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떠올릴 때 늘 '조용한 기품'이라는 말을 함께 꺼내곤 합니다.
 


김옥숙 여사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긴 어렵지만,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자리를 지켜온 그 시간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부분으로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강한 인상으로 남은 김옥숙 여사. 앞으로도 그분의 흔적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따뜻하게 남아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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